College Of Engineering
서울공대 이야기

이(理)의 위기가 공(工)의 위기 불렀다

 

최재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이공계 위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理)’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로 시작된 기초학문의 위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지적되어온 일이다. 다만 그 동안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공(工)’마저 흔들리는 바람에 졸지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이’의 위기가 결국 ‘공’의 위기를 부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공계의 위기를 해결한답시고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땜질 처리만 한다면 또 다시 ‘공’만 간신히 물 밖으로 건져내고 ‘이’는 여전히 익사 직전으로 남겨놓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공계 위기는 본질적으로 기초학문의 위기이다. 기초학문이 제대로 서면 기술 발전은 자연히 따라온다. 대입 수험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다른 교육정책이 다 그렇듯이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공계 지원을 더 유리하도록 입시정책을 수정하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공계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공계 졸업자들 중 상당수가 아직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시적인 이공계 지원자 감소가 당장 중대한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아니니 고통의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하더라도 이 기회에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1. 위기의 본질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했지만 나는 그에 못지않게 인간은 ‘과학적 동물(Homo scientificus)’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그 어느 동물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두뇌를 갖도록 진화했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과학이 탄생했다. 과학은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과학기술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감히 인간이라는 동물의 자연서식지는 이제 과학기술로 창조된 세계라고 단언한다. 우리 모두 과학기술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


      속세를 피해 산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도 이젠 어쩔 수 없이 산성비로 오염된 개울물을 마셔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세상에서 잠시 쉬겠다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휴대폰을 챙기고 공항이나 호텔마다 인터넷이 그물망을 치고 있다. 우리들 중 일부가 항생제를 남용한 바람에 인류 전체가 점점 더 지독한 병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제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 이상 과학기술의 영향권 밖에서 살 길은 없다. 그리고 길은 한 방향으로만 나 있는 듯 싶다. 이젠 더 이상 과학기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어 보인다.


      동굴시대에도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있었다. 누구는 야생 동물들의 행동과 이동경로를 관찰하여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또 다른 이들은 늘 새로운 도구를 고안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곳에는 또 이 같은 과학기술인들의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혜택을 입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여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식수용에 무관심하거나 느리거나 아니면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석기시대인들이 삶의 질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을 것은 쉽게 짐작하고 남으리라. 또 이런 과학기술인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부족이 그렇지 못한 부족보다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과학기술력이 바로 국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닌다.


      선사시대는 밀어두고 역사시대만 보아도 헤게모니의 이동은 과학기술의 주도권 싸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원래 과학의 역사를 주도했던 곳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었다. 종이, 나침반, 화약, 시계 등 이미 1세기 경에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발명품들이 서구에 등장한 것은 10세기나 그 이후였다. 서양의 과학이 동양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였고 본격적으로 그 힘의 불균형이 국제정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였다. 1842년에 벌어진 아편전쟁은 그 중 가장 상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 때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었던 중국이 이제 자발적으로 과학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뛰고 있다. 이처럼 과학만이 살 길임은 너무도 자명한데 우리는 지금 그걸 외면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그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확실하게 과학기술을 중흥하려 노력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


      우리 나라 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최근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논평이 간단명료하게 진단한다. “1960-70년대 한국의 과학기술인 우대와 청소년들의 이공계 선망 분위기가 80-90년대의 고도성장을 낳았다. 2000년대 초 이공계 기피현상을 보며 2010년 이후 한국의 모습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이공계 위기는 그 규모와 성격은 조금씩 달라도 웬만한 선진국이라면 다 겪은 과정이다. 다만 위기감을 느끼자마자 대책 마련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정면 돌파한 나라들은 위기를 무사히 넘겼거나 넘기고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장기적인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애써 멀리 둘러볼 필요도 없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만 비교해보아도 위기의 본질은 간단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기적인 경제불황으로 자칫 이류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는 일본은 바로 10여 년쯤부터 나타난 이공계 기피현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의 차관급 이상 공직자 중 이공계 출신은 불과 3%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중국은 국가 최고지도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7명 중 이공계 출신이 장쩌민 주석을 비롯하여 무려 6명이나 된다. 거기다가 최근 제정된 과학기술상의 상금 규모가 자그마치 8억 원에 이르는 등 과학기술인들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인구의 힘만으로도 강대국 대열에 진입할 차비를 갖춘 중국이 동아시아는 물론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비록 침체에 빠져 있지만 이미 기술력과 자본 축적에서 선진화를 이룩해 놓은 일본과 우리 나라의 사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처 선진국 수준에 다다르지도 못한 시점에서 이공계 인력마저 감소한다면 머지 않아 또 다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까 두렵다. 경제적 속국으로 겪을 설움은 정치적 속국으로 겪었던 설움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2.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과 언론 매체들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대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과학기술인들의 신분 보장과 사기 진작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나는 이를 ‘과학기술자의 행복지수 개선’을 위한 방안이라고 부르려 한다. 다음으로 시급한 것은 지속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국가제도 또는 사회 인프라구조의 구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바로 대국민 홍보전략의 수립이다. 이 세 가지 기본방향은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 가지 모두가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어야 이 위기를 보다 신속하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1)      과학기술자의 행복지수 개선


      자신의 직업을 자식에게 권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만큼 행복지수가 낮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가늠자가 또 있을까? 자기 직업에 대한 만족도 또는 행복지수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직업 보장, 처우 개선, 그리고 쾌적한 작업 환경조건의 확보가 그들이다. 대학교수를 제외한 우리 나라의 많은 과학기술인들은 직장에 대한 확신이 없는 가운데 다분히 불안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 사이언스지는 우리 나라가 몇 년 전 외환위기를 겪을 때 특별히 과학기술인들이 대거 실직한 점을 이공계 기피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경기가 나빠지면 특별한 전문성이 결여된 관리직이 먼저 해고되는 외국의 경우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이다. 아직도 우리 국민들은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진학하며 전공을 택할 때 조금은 서글픈 일이지만 취직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근래 몇 년간 KDI를 비롯한 몇몇 경제 또는 교육관련 연구 기관들은 국내 연구인력 현황에 관하여 수요와 공급에 상당한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았다. 이들 연구 결과들은 한결같이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인력이 모자라 허덕이는데 수요가 늘지도 않는 기초과학 분야의 공급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과학기술 인력 수급에도 시장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우리 옛말이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구진을 구성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본 속담일 것이다. 우리 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고급 인력층이 너무도 얇아 급변하는 산업구조에 신속하게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잘 나가는 분야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은 장차 그 분야에 필요하게 될 인력을 미리 길러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미래의 산업을 어느 분야가 주도할 것인지, 그리고 그럴 경우 어떤 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과학 분야들을 항상 고르게 발전시켜 놓아야 하고, 또 선진국들이란 바로 그걸 잘 해놓은 나라들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늘 이윤을 남겨야 하는 기업들이 이처럼 먼 미래까지 걱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이 세금을 거둬준 것이다. 기초과학기술인 양성에 더 이상 그 어쭙잖은 시장원리를 적용하지 않길 바란다. 장차 어떤 분야에 어떻게 쓰일 지 모를 기초과학기술의 수요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영원히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변화를 허겁지겁 따라가기 바쁠 뿐이다.


      불행한 삶의 질곡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밖에는 없다. 나는 선진국이란 변화를 주도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나라가 전 국민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 선진국 대열에 가까스로 턱걸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 변화를 주도하는 선진국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단단한 기초학문을 구축하기 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정부가 책임지고 기초과학의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으로 다른 나라들처럼 기초과학 분야의 국가연구소들을 만들어 기초과학인들에게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 나라에는 이를 테면 수학연구소나 생태연구소도 하나 없다. 우리 나라가 선진대열에 진입하려면 연구소의 연구원은 물론 대학교수의 수도 적어도 현재의 두세 배는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단기적인 시장원리를 적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정말 철저하게 시장원리를 따른다면, 나는 종종 우리 나라의 모든 대학을 폐쇄하고 고등교육은 모두 선진국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생각도 해본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경제적인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것이다. 꼭 시장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보다 장기적인 계산을 해야 한다.


      보수 인상, 주택 제공, 자녀 학비 보조, 세제 혜택, 연금제도 마련 등을 비롯한 처우 개선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물론 예산 문제가 뒤따르는 일이겠지만 정부의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어떤 의미로는 가장 손쉽게 시행할 수 있고 또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책이다. 선진국처럼 과학기술자의 보수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보수보다 높으면 공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지원 학생의 수가 늘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선 보수만 보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현재의 두세 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어’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는 구절이다. 나는 요사이 우리 과학기술계에 그 어느 누구도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보람 있는 연구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연구원이나 대학교수의 연구 업적이 줄어드는 원인으로 전체 응답자의 40%가 ‘과중한 관리 업무로 인한 자기 계발 시간의 부족’을 들었다. 잡무에 시달려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푸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외국 대학의 실험실들이 보유하고 있는 연구보조원(technician)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국과 달리 연구보다는 행정 관리 업무를 전담해줄 보조원이 필요하다. 모든 교수에게 일일이 보조원을 제공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비슷한 연구를 하는 교수 몇몇을 하나의 단위로 묶은 후 그들에게 행정보조원을 붙여주면 연구 업적에 상당한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조원은 단순히 잔 심부름이나 하고 공문이나 처리하는 그런 보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공계 대학을 나와 석사과정을 수료하여 직접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연구수행에 필요한 모든 제반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보조원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수나 연구원은 오로지 창의적인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 그리 많은 경비를 들이지 않고도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국가제도와 사회 인프라 구축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스노우(C. P. Snow)가 일찍이 1959년에 경고했던 ‘두 문화(two cultures)’의 장벽, 즉 문과-이과 또는 인문-이공의 장벽이 우리 나라처럼 높은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최근 교육인적자원부가 대입수능시험에서 교차지원을 허용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찌 보면 이 두 장벽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 2005년부터 실시하기로 되어 있는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표면상으로나마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의 구분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수험생들의 질적 저하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현재 이과 지망생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의 수학과 과학을 고등학생 모두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 계통으로 분류해온 분야들도 최근에는 점점 더 상당한 수준의 수학과 과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심리학은 거의 자연과학 쪽으로 기운 지 오래다. 세계 경제학계에 우리 학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문분야에서 우리 나라에 첫 노벨상을 안겨줄 학자는 전통적인 자연과학 분야가 아니라 경제학 분야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경제학자들은 대개 수리경제학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받았던 스파르타식 수학교육의 덕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인류학, 철학, 언어학 등 수학과 과학적 사고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문사회 분야가 요즘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교육은 어차피 일방적인 것이다. 먼저 산 세대가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수학과 과학 교육을 흥미롭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흥미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가르침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반복 훈련만 하고 있는 고교과정을 줄이고 대학과정을 늘려줄 것을 제안해왔다. 이른바 ‘5-5-5제’라고 이름 붙인 이 제도는 초등학교 과정을 5년, 중등학교 5년, 그리고 대학교 과정을 5년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전체적으로는 교과과정이 1년 단축되지만 보다 전문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대학과정은 1년 증가한다. 학문은 날이 갈수록 전문화하는데 현행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로 인한 전반적인 학력저하는 학문 발전과 국가 경쟁력에 심각한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인문사회 계통도 그렇겠지만 특히 단계적인 교육이 필요한 자연과학 분야는 현재 채택하고 있는 학부제 체제로는 충분한 전공교육을 실시하는데 필요한 절대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대학 교육의 질적저하에 따라 대학원 교육마저 파행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장해온 5-5-5제는 교육계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한 제도라서 쉽게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이번 기회에 이공계에 한하여 단계적으로 시행해보면 어떨까 싶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공계에 관심이 있고 능력이 되는 학생들에 한하여 대학진학시기를 1-2년 단축시켜주는 제도이다. 그리고 일단 대학에 들어오면 설령 5년으로 되어 있는 과정이더라도 본인의 노력에 따라서 더 일찍 졸업할 수 있도록 융통성 있게 운영하자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사기 진작 정책에 따라 과학기술자의 장래가 밝아지고 하루라도 빨리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된다면 진정 능력 있고 관심 있는 학생들을 이공계로 불러모을 수 있는 지름길 역할을 해줄 것이다.


      대학은 대학대로 지금처럼 인문사회와 자연계열을 분리하여 교육할 것이 아니라 예전의 문리과대학과 비슷한 ‘기초학문대학’을 만들어 신입생을 받았으면 한다. 나는 대학에서 자연과학 과목들을 가르치지만 비교적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강의를 한다. 자연과학을 택한 학생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미건조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함양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다.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특히 생명과학의 발달이 인간 존엄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시점에서 과학기술인 스스로 인문학적 관점을 습득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시대를 사는 인문사회계 학생들도 과학의 기본을 알기 위해 과학기술학 정도는 수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정도로는 너무 소극적이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을 위해 따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놓은 과목 한두 개를 듣는 걸로는 부족하다. 외국 대학의 학생들처럼 자연과학계 학생들과 함께 본격적인 과학 과목들을 필수로 몇 개씩은 수강하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기초학문대학이 세워져 그리로 들어온 학생들은 이런 구분 없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골고루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합과정을 거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전공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에서는 박사과정의 지원을 외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로서는 BK21 사업단에서 월 6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받는 것이 국내 최고 수준인데 이는 사립대학의 경우 등록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액수이다. 겨우 생색만 내는 수준이 아니라 최소한의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은 지원해야 한다. 적어도 월 150만원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BK21 사업단이 지급하는 형식이 아니라 미국처럼 과학재단이나 학술진흥재단 등이 맡아 전국적인 규모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만을 전담하는 ‘과학기술 장학재단’을 따로 설립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대학 3학년 말이나 4학년 초에 지원하도록 하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기가 원하는 대학원의 원하는 지도교수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할 수 있는 장학금 지원과 함께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확충하고 전세금을 무상으로 대여하는 방법 등을 활용하면 최소한 학위과정 중에는 재정적인 걱정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 것이다.



3)      대국민 홍보전략 수립


      과학과 과학자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TV 프로그램처럼 젊은 세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매체는 또 없을 것이다. 이제는 국내에도 제대로 조명만 받으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과학기술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TV는 물론 여러 다른 매체들과 행사들을 통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쳐야 한다. 그런데 과학을 알리는 일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있다. 과학을 알리는 일에 뛰어들 홍보 대사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대학도 이제는 무한경쟁시대로 돌입하며 연구업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 과학의 대중화에 어느 정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자부하는 나도 더 이상 희생을 감수하기 어려워 요즘은 몸을 사린다. 과학의 대중화에 쏟는 노력의 결과들은 자연과학 분야의 개인 연구업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과학재단은 이미 과학의 대중화에 쏟은 노력을 평가에 크게 반영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보다 확실한 대책으로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과학기술부에 이른바 ‘과학문화 석좌교수제’를 제안해왔다. 석좌교수는 본래 연세가 지긋한 원로교수에게나 주어지는 거창한 자리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우면 ‘과학문화 국가교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문화 국가교수는 임기 동안 연구업적의 절반 정도를 과학 홍보 업적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이다. 그 동안에는 과학기술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이 같은 협조를 받아내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생각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저서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는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과학홍보 석좌교수(Endowed Chair in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로서 일반 대중이나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위한 과학저술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 화학과의 애트킨스(Peter Atkins) 교수도 연구를 접고 과학저술 활동만 하고 있다. 우리 과학계에도 과학을 알리는 일이 연구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과학문화 국가교수라는 당당한 멍석이 깔리면 자신의 연구에 약간의 피해가 있더라도 기꺼이 과학 홍보 사업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재능 있는 과학기술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선 과학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늘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과학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서서히 걷힐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저 전문 지식만을 갖췄을 뿐 세상사에는 관심도 없고 보편적인 사고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전혀 근거 없는 선입관 때문에 흔히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지도력이나 비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관리 경영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조금도 손색 없는 우리 나라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영진이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학기술인들은 글을 못 쓴다는 얘기도 따지고 보면 이렇다 할 근거가 별로 없는 소문이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문학적인 글쓰기에 익숙해 있어서 그렇지 정확성과 경제성을 요구하는 과학적 글쓰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이다. 실제로 외국에는 과학자 출신의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간결하고 정확한 과학적 글이 그들에게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글도 잘 쓰고 감성적인 과학자들이 성공했다. 과학기술인들의 이런 면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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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9 새내기 대학탐방기(8)--낭만?!─_─;;;즐;;;; [7] sweetpea 2004.07.07 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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