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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대 이야기

핵 개발과 민족주의

2006.02.23 11:39

kmw46 조회 수:4105

 

핵 개발과 민족주의

최성우의 과학은 어디로 가는가 - 과학과 정치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는 다소 독특한 제목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일약 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바 있다.


수백 만 명 이상의 독자가 감동을 받고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소설은, 박정희 정권 시절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도 전해지는 한국인 출신 천재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록 소설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한국인 출신으로는 노벨과학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었다고도 간혹 거론되는 탁월한 물리학자가 바로 고 이휘소(李輝昭) 박사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 실제 어느 정도까지 진전이 되었던 것인지, 전자기약력 작용의 재규격화 이론(renormalization theory) 증명 등 이론 입자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휘소 박사가 자신의 분야와는 직접 연관이 없는 핵 개발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 등은 접어두기로 하고, 우리나라 대중들이 이휘소 박사와 이 소설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하다.


똑같은 분야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 역시 물리학을 전공했던 필자로서는, 아무튼 이 소설 덕분에 그 이전까지 대중들이 잘 몰랐던 이휘소 박사가 널리 알려지고 물리학자 주인공이 국민적 관심과 각광을 끌게 된 점은 고맙게(?) 생각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이나 우려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유럽의 중동부에 위치한 헝가리(Hungary)라는 나라가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마자르족으로서 동양계에 뿌리를 두고 있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오랫동안 외부의 침략과 고난을 되풀이했던 불행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서, 어찌 보면 우리나라와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얘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 기초과학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높은 것으로 평가되며, 근대 이후 저명한 다수의 과학자들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20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레오 실라드(Leo Szilard; 1898~1964),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 1902~1995),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1908~ ) 등 쟁쟁하기 그지없는 물리학자, 수학자들이 모두 헝가리 태생이다.


그런데 이들 4명의 과학자들은 헝가리 출신이라는 점 이외에도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 등을 비롯하여, 모두 공교롭게도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 핵무기 개발에 참여해 왔다는 점이다. 실라드는 우라늄 연쇄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당사자이다.


위그너는 실라드와 함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을 설득하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나치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제언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후에 수소폭탄 연구에도 참여한 바 있다. 노이만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새로운 기폭 방법을 컴퓨터 계산으로 입증함으로써 원자탄 개발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고, 전쟁 시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후에 ‘컴퓨터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텔러 역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계획을 총지휘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미국, 소련의 잇따른 핵무기 개발과 군비 경쟁으로 인한 전 인류적 위기가 고조된 데에 대해 인간적 고뇌나 양심의 가책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다만 예외적으로 실러드만이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의 실전 투하에 반대하고 전후 핵무기의 확산을 막으려는 과학자들의 모임인 퍼그워시회의에 참여했을 뿐이다. 특히 텔러는 여러 과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을 밀어붙여 ‘수소폭탄의 아버지’라 불릴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시절 이른바 ‘별들의 전쟁(스타워즈)’ 계획마저 추진했던 인물이다.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고 되뇌면서 원자폭탄 투하 이후 죄책감에 시달려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던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1904-1967)마저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텔러가 수소폭탄의 당위성을 위한 로비와 기술적 문제 해결에 앞장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 헝가리 출신 천재 과학자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하필이면 인류의 파멸마저도 자초할 수 있는 핵무기의 개발에 매달렸는지는 흥미로운 의문의 하나이다. 혹시 이들에게는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시달려온 민족적 설움을, 가공할 무기 개발을 통해서 풀어보려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던 것 아니냐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해석이 정확하건 아니건, 아직 핵을 지니지 못한 여러 나라들이 비슷한 이유를 들어서 핵개발에 나선다면 이것은 심히 우려될 일이며,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강대국 중심의 기존 핵질서 ‘기득권’ 인정 여부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마지막 부분에는 비록 가상 시나리오라고는 하지만, 남북한이 합작하여 자체 개발한 핵미사일을 날려서 일본을 굴복시킨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소설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통쾌하고 감동적인(?) 민족적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선사했을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로서는 우려가 앞섰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격언이 마치 과학기술의 과도한 국수주의화, 애국주의화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개발 문제 등으로 인하여 핵 연구에 관한한 도리어 강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과도한 감시와 견제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가,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경우는 좀 다를지 몰라도 필자의 우려가 그다지 과민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공계 기피현상을 걱정할 정도로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인에 대한 대우와 평가에 인색한 이 나라에서, 대중들이 최근 곤란에 처한 어느 세계적 ‘스타과학자’ 한 분에게 쏟는 맹목적인 지지와 호의는 지나침을 넘어서 거의 집단적 히스테리에 가까운 정도를 보이고 있다.


이 분이 소설 속의 이휘소 박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일까? 일찍이 공자가 얘기했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는 경구 역시 그리 진부한 교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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