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ge Of Engineering
서울공대 이야기

 

부전자전

─ 내 아들이 공대 교수가 되다니

안태완|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명예교수


孟子曰 “君子有三樂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라 하였듯이, 군자에게 세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그 세 번째 즐거움이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이가 같은 전공으로 국내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였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국내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학교에서 같은 전공으로 나의 아이가 나의 뒤를 이었으니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에게는 사연이 있다. 이런 사연을 공과대학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주로 보는 이 책에 소개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 혹은 실망을 주는 글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을 사실대로 전달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우선 나의 공과대학 교수생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내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당시 응용화학과에서 조교수를 시작한 것이 1965년, 꼭 4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대학의 연구 및 교육환경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였다. 강의실은 초등학교 교실과 같이 교탁과 칠판이 전부였고 효과적인 지식 전달을 위한 시청각 설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좋은 강의를 하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더욱이 실험 설비는 거의 전무하여 실험실에 분석기기도 없고 단지 초자 기구 몇 점만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올바른 대학의 공학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는가? 서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을 바보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되고 반성도 해보았다. 교수가 연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강의하겠는가? 새로운 지식에 대한 도전도 하지 않으면서 대학 교수로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도 하게 되었다.  초창기 나의 교수 생활은 여러 가지 고민 속의 방황의 연속이었다.

대학이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에 기업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산학협동을 통해서 기업의 산 연구를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공대 교수로서 뜻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기업의 대부분은 소위 Turn-Key System에 의존하여 완성된 기술을 도입하여 공장을 건설하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기술 개발을 통하여 도입된 기술을 소화하고 개량하여야 하며, 제품의 품질을 안정화 시키고 생산성을 높여 생산원가를 낮추어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여 1970년에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주)효성에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고 나 자신도 동참하였다. 공업화의 감각을 학생들에게 익히게 하는 교육적인 목적과 당시 상대적으로 연구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연구소에서 연구를 병행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루어 낸 일이었다.

기업 연구소에 있으면서 제품의 품질 향상과 신제품 개발의 측면에서 기업의 흐름을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주어진 기한 내에 목적하는 품질향상을 위하여 끊임없는 독촉을 받고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밤낮 구별 없이 연구에 몰두하였고, 차츰 누적되어 가는 국내 기술에 의한 신제품 개발의 성공으로부터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공학도의 입장에 대하여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연구가 뜻대로 성공리에 끝나면 그간의 고생을 이해하여 주기 보다는, 연구원들이 해야 하는 의무이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신제품 개발은 연구소, 공장, 영업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여야 성공하는데 상호협조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신제품 개발에 성공하고도 좋은 품질의 제품이 생산되지 않거나, 공업화된 제품도 원활한 판매로 연결되지 않아 기술이 사장(死藏)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어렵게 이루어 낸 공업화와 성공적인 판매로 이어진 제품은 판매를 담당한 영업 부문의 공으로 돌아가고, 공업화는 성공하였지만 판매가 되지 않아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주지 못한 제품은 제품의 품질을 문제 삼아 연구소와 공장으로 실패의 책임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섭섭한 마음과 공학도로서의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힘든 기업 연구소의 생활을 경험하면서 나의 아들들에게는 이공계 공부를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에게 문과 공부를 하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30여 년 전에 우리나라의 공업발전과 더불어 씨앗이 뿌려지고 지금에 와서는 나무로 자라 큰 숲으로 형성 된 것뿐이다.


큰 아들은 나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문과를 선택하였고,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MBA와 Law School을 마치고, 현재 미국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작은 아이인 철희는 고2가 되면서 이과를 선택하겠다는 의견이 야기되었다.  아들 둘 중 하나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이과를 선택하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내 인생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고, 너의 삶은 네가 개척 하는 것이니 아버지와 연관짓지 말고 문과를 공부하라고 설득하였다. 이런 이과와 문과 선택의 논쟁이 3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아들의 의견이 너무나 확고하여 만약 나의 강요에 못 이겨 문과를 선택하여 자기의 일생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 결국 아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작은 아이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나와 같은 고분자공학 분야를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재료공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주장했던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겠다던 뜻대로 되었고, 내 자신도 아들의 주장을 따라 준 것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주말마다 작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우려했던 것보다 심각해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많은 기업들이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 개발만이 기업의 살 길이라 외치면서 수조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는 오히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점점 더 깊어가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사회적 변천에 따라 사람의 생각이 변화되면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공과대학 교수들만의 책임으로 넘기면 더욱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된다. 정부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병역혜택을 주는 등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런 구상은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고 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편집자가 나에게 원고를 의뢰 했을 때는 아들이 공대 조교수가 된 것에 대한 나의 감상을 말하기를 원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 속에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더욱 깊어져 가고 대학교 교수의 위상이 예전에 비하여 많이 실추된 현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학생들로부터 존경 받는 교수가 될 수 있을런지 , 교수 상호간에 서로 협력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런지, 좋은 논문을 발표하여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런지, 우리나라의 공업발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런지...  


繩鋸木斷 水滴石穿(노끈 톱이 나무를 끊고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이란 말이 있듯이 학문의 세계에는 하루 이틀 만에 쉽게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쉬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꾸준히 노력하여 좋은 성과를 내고 훌륭한 교수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여러 교수님들과 동창님들께 우리 아이가 자기 몫을 충분히 해 나아갈 수 있도록 선배로서 동료로서 많은 지도편달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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