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ge Of Engineering
서울공대 이야기

 

술독에서 탈출한 어느 술꾼의 수기

<나의 지난 20여년 - 서울대에서 연변과기대까지>


                                        정 진 호  중국 연변 과학 기술대학교 교수

재료공학부 졸업

<청춘의 때를 회상하며...>

  서울공대 후학들을 위한 글을 써 달라는 원고 부탁을 받고 나의 지난 대학 시절을 돌이켜 보니, 자랑할만한 것이 별로 없다. 오히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들을 헛되이 사용하였다는 안타까움이 촉촉이 젖어올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었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아무런 희망도 목표도 없이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며 잿빛 인생을 흘려 보내고 있었던 가장 실패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비록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공대에 입학하여 그 당시 유행하던 대로 자랑스런(?) 뺏지를 달고 다니기는 했지만, 대학 입학이라는 인생의 목표가 사라져버린 나에게는 도무지 무엇을 해도 가슴을 채울 수 없는 공허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생활을 보내었던 1977년에서 81년의 그 당시 한국은 독재 정권의 마지막 질주와 그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의 치열한 전투가 온통 대학가를 휩쓸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텅 빈 강의실의 창가에 서서 데모대의 외침과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어둠이 깔리면 학교 근처의 싸구려 주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들 가운데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두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내면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여학생들을 좇아 다니며 연애에 빠져있었고, 문학을 하겠다고 시와 소설을 긁적이던 시절... 캠퍼스 내에서는 내 삶을 전부 바쳐 외쳐댈만한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휘날리는 연 꼬리를 바라보듯 진리와 사랑의 끝자락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생활을 하며 술잔만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26에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국에 대학 생활을 해야했던 사람으로서 술꾼들이 항상 토로하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시대적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의 음주 행각은 그 이상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술잔까지 다 비우고야 일어나는 습성이 붙다보니 결국 온몸이 알코올에 깊이 찌들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술이 어느 이상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속 깊숙이 감추어 놓았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곤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을 즐기며 찾아오는 술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술좌석에서는 항상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내가 술을 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닷새 가량을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되니 거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나마 며칠씩 건너뛰는 날은 평소에 폭음을 하던 연고로 술병이 나서 드러눕는 통에 쉬었을 따름이다. 그런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는 술의 애찬가였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술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뚫려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에게는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의 마음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속의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무렵에도 이미 나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적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던 알코올 기운이 빠져나가면 갑자기 찾아오는 무력감과 초조감이 엄습하였고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 있던 나를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내 몰아치기 시작하였고, 망각 속에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었던 절대자의 존재를 어슴푸레 다시 떠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어찌되었건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회복되어가던 무렵에도 나는 술을 끊을 수 없어서 아내의 간곡한 부탁도 뿌리치며 3년 간이나 교회 나가주는(?) 것을 거부하며, 일요일마다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집안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살인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술 행각을 가늠키 위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조해 보기 바란다.

 < 내가 ‘선험적 술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알코올에는 무감각한 이상 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는 자신의 주량을 제대로 측정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내가 술기운이 가져다주는 일시적 흥분을 미처 맛보기도 전에 내 앞에는 팔방으로 기울이고 엎드린 채 무절제한 쾌락 이후에 들어가야만 하는 침묵과 고통의 세계로 침잠해 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면, 나는 술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침튀기며 오가던 온갖 종류의 사회 정의와 철학 사상과 민중 해방의 부서진 말 부스러기들을 어지러운 탁자에서 쓸어모아 쓰레기통 속으로 처넣으며 전우의 시체들을 유가족에게 운구하는 힘겨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어깨에 매고 호송 차량으로 운반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름달이 휘영청 드리우고 있던 자정 녘의 대문 앞에서 탈춤을 추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취면(醉眠)에 빠진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어머니로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한탄 섞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나의 가계(家系)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나는 그런 족보를 지닌 가계였다. 나의 고조 할아버지 - 그 이전은 그냥 미루어 짐작토록 하라. - 는 온 동네가 알아주는 모주꾼으로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취해서 다니다가 말년에 술기운에 실족하여 동네 다리에서 떨어진 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를 이어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망국 이후에는 일체 문밖 출입을 안하고 술만 퍼 드시다가 마침내 술독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나는 그 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퍼내기 위해 큰 항아리 속을 거꾸로 더듬다가 처박히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표현이 지니는 이중적 묘미를 상실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 후에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했는데, 나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나타난 두 분의 형제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본즉, 그 형제는 어린 시절 당신들의 어머니 - 그러니 나에게는 증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 가 지아비의 술 행각 때문에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뒤에서 눈물겹게 바라보다가, 우리 형제는 평생 입에 술을 대지 말자는 비장한,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같은 것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 두 분은 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내외 학계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나의 어머니는 그러니 너도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를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의 가계를 통해 흐르는 술의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나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윗대에서 한 박자 쉬었던 여세를 몰아가며 4형제가 사회 각층에서 알아주는 거포로서 맹활약을 벌이게 된다. 물론 나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신이 학자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술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시대 상황, 즉 6.25 전쟁과 4.19 학생 의거와 5.16 혁명으로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변명을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벌겋게 늘어놓곤 하였다. (중략), 자전 소설 중 拔萃 >

 1988년 2월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후 MIT 대학의 박사 후 과정에 입학허가를 받게 된 나는 지독하게 술 권하는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술꾼들의 마지막 고별주의 세례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미국 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보스턴 공항에 나를 마중하러 나와있던 어느 후배의 도움으로 뜻하지 않게 교회 생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나를 알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속으로는 아내의 권유에 못 이기는 채 한번쯤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체면상 그리고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던 그곳을 전혀 다른 나라와 문화 속에서는 어렵잖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점차 술, 담배와 거리가 먼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고, 또 다른 체면상 점차 술 담배를 멀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12년간이나 남들이 평생 마셔도 남을 만한 술을 이미 마셔버렸고, 술 마시는 날이면 몇 갑씩 함께 피워대던 담배를 일시에 끊으려 하니 밤에 자다가도 담배 피우는 꿈을 꾸는 등 여간 고통이 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침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몰아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마시고 싶던 술이 갑자기 꼴도 보기 싫게 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는 한번도 술 담배에 대한 유혹을 받아본 일이 없다. (그 무렵, 나는 미국서 김진경 총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을 향해 돛을 올리게 된다.)     

 내가 미국 생활 3년만에 완전히 돌변하여 돌아오니, 과거의 추억을 싸 짊어지고 내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술친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때로는 실망을 너머 조롱과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진호‘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술을 연상하던 그 친구들이 한결같이 의아해 했던 것은 어떻게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실 뿐 아니라 아예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권함에 못 이겨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내 몸이 전혀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체질이 아주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변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여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것이 내가 믿게 된 종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술 기운을 빌어서 내 인생의 공허를 채울 필요가 없는 확실한 인생의 목표와 비전을 발견했기 때문이요, 내 안에는 술기운 보다 더 뜨거운 다른 기운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옛 술(old wine)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새 술(new wine)에 취했다고나 할까?

오직 인간만이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생의 의미란 삶의 방향성의 회복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우며 그 가슴인들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는 산중미아(山中迷兒)가 되어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우연히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존주의를 희구하던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의 말로가 결국은 절망과 자기 모멸로 끝맺음했던 것을 기억하며 참다운 실존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재삼 느껴본다. 갈 길이 정해져 있고 목표가 뚜렸한 사람에게는 인생은 언제나 충만한 기쁨과 의미 있는 할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인생의 참 목적을 발견한 후,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귀중한 대학 시절 그 아름다운 청춘의 때를 헛되이 보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만회해 보기 위하여 다시 찾아온 캠퍼스가 바로 YUST(연변과기대)이다. 비록 내가 못 다한 대학 시절이지만, 후학들을 통해 청춘의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청춘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와 사명의 깨달음>


 학창시절에는, 나는 내가 하는 공부와 학문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고민하며 방황하였다. 만일 나의 전공 공부가 단지 내 인생에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호구지책으로서의 직업(job)을 찾는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나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갈구... 즉, 참 진리를 발견하여 삶의 목적을 깨우치고자 하는 갈증과 욕구가 강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1988년 미국서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로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내가 하는 전공 과목도 새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내 삶의 목적 속에 나의 학문과 직업조차도 함께 용해되어 들어가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함을 알게된 것이다. 나의 인생을 통해 부름받은 직업(vocation)이 곧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함을 믿음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1990년 미국 워싱톤 근교에서 개최되었던 KOSTA(해외 유학생 수양회) 집회에 참석해 송인규 박사님의 아침 강연을 통해 복음 안에서 신앙과 학문,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하나로 통합되며 통전적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영성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실마리들을 하나씩 풀어가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그 당시 중국 정부로부터 대학설립 인가를 받은 후 함께 일할 교수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참가한 김진경 박사님(현, 연변과기대 총장)을 통한 중국으로의 부르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진홍 목사님의 저녁 설교들을 통하여,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며 실천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해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믿음을 갖고 나서 비로소 인생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내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서서히 나타난 것이 복음, 통일, 중국이라는 세 가지 화두(話頭)였다. 우리 민족이 살길은 복음 안에서 통일되어 앞으로 21세기를 주도할 중국을 향해 뻗어 나가야만 한다는 이 시대적 사명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발걸음을 이곳 연변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이곳 연변 땅 만큼이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미래적으로 이 세 가지 명제와 깊이 연관되어 중요성을 품고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후 중국 대륙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91년 포항에 정착한 나는 그 비전을 실현시킬 방향을 구하며 새벽마다 기도 가운데 매달리게 되었고,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 마침내 중국 땅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골방에 가두시어 이 문제를 두고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보스톤 대학에서 오르간을 전공하고 돌아온 후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주회를 마치고 교회의 Organist로, 대학의 강사로 바쁘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던 아내를 설득하는 일도 문제였지만, 양가 부모나 직장 선후배 어느 누구 하나도 그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것은 마치 혼자만의 고독한 질주를 하는 마라토너의 심정과 같은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요구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내가 받은 탤런트 중 글쓰는 탤런트를 사용하여 세상 문학이 아닌 복음 선포를 위한 글을 쓰도록 한 것이었다. “아바(Abba)”라는 소설을 통하여 나의 지난날 살아왔던 35년 세월의 추한 모습들을 다시 비추어 보게 되었고,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모습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래도 아직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느냐? 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절대자의 음성과도 같았다. 결국 울며 부인하던 아내마저 함께 기도하게 되었고, 소설 “아바”가 홍성사의 <믿음의 글들> 시리즈로 출판됨으로 중국 대륙을 향해 떠날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의 징표를 받았던 것이다.

 1994년 여름, 우리 가족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을 향하여 이 시대를 향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중국으로 떠났다. 지금은 이미 국제 공항과 같은 현대 시설을 갖춘 공항으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당시 시골 역사와 같았던 연길 공항을 내려서며 잔뜩 긴장한 아내와 초등 1학년짜리 아들과 함께 처음 중국 땅을 밟던 기억이 생생하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초라한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레임으로 젖어왔다. 순간, 내 나이 서른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는 응답되었고, 마침내 타임머신이 작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7년간 내가 이곳에서 받은 기쁨과 감사는 지난 청춘의 방황하던 시절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값진 시간들이었다. 지난날,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가난과 설움을 안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넜던 우리 조상들... 일송정, 해란강을 끼고 달리며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 운동을 펼치던 그들의 후예가 살고 있는 만주 땅에서 그 청년들과 만나서 함께 울고 웃으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 자체가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대륙에 남겨진 우리의 200만 조선족들은 장차 한국과 북한이 통일된 이후 중국과의 실질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게될 꼭 필요한 보배와 같이 귀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 근대사의 뿌리와 애환이 숨쉬고 있는 땅에서 참 교육에 대한 비전을 심으며, 그것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통일 시대와 동북아 시대를 준비하는 일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다. 

 그 일에 동참하기 위해 세계 10여개국에서 모여든 150여명의 외방 교직원들... 그 가운데는 나와 서울공대 금속과를 함께 졸업한 김동구 교수님를 비롯하여, 조선과를 졸업한 노환진 교수님, 산업공학과의 소영섭 교수님, 건축과의 주수길 교수님, 토목과의 한우섭 교수님, 전자과의 박인용 교수님, 심욱랑 교수님,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계시다가 합류하신 김석산 교수님 등 10여명의 동문들도 있다. 1,200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직원과 마치 한 가족처럼 어우러져서 생활하는 이 학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육 공동체를 형성한 대학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사회주의 교육 체제 속에서 굳어진, 거칠고 닫힌 마음의 신입생들을 받아 <진리, 평화, 사랑>의 교훈과 <창의, 협력, 봉사>의 실천 강령 아래, 열린 세계관과 국제 감각을 심어주고 미래에 대한 무한한 꿈과 비전을 바라보게 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복도에서 너나 없이 웃음으로 인사하고 지나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저들이 앞으로 이 민족과 중국의 미래를 밝힐 희망임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 그토록 높은 학력과 믿음을 자랑하는 지성인과 신앙인들이 많이 있지만 왜 사회가 바로 서지 못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지성과 영성의 편향성, 즉 지식과 믿음의 불완전성에도 그 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지성과 영성을 함께 갖춘 지도자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지적 존재임과 동시에 또한 영적 존재이기에 부분적 지성이나 영성으로는 시대를 꿰뚫어 보고 앞서나가는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이 시대에 지성과 영성의 탁월함을 함께 갖춘 통전적 지식인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신앙인과 지식인이 지나치게(?) 많은 한국사회를 둘러 볼 때, 영성에 치우친 또는 지성에 치우친 반쪽 지도자들이 교회와 세상을 갈라놓고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이분화 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는 우등생이 왜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우등생이 되지 못하는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 계층은 어째서 일반 국민들에게 도덕적 신뢰를 송두리채 잃어버리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하는 숙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지성과 영성이 함께 어우러진 치우침 없는 지도자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은 내가 YUST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추구하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중국 사회와 저 얼어붙은 동토의 땅 북한을 향해 뛰어들어가 갈라진 마음들을 회복시키고 통일시키기 위한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연변과기대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이 학교를 통해 윤동주, 안창호 선생과 같은 새 천년을 밝힐 민족 정신의 지도자들이 배출될 뿐 아니라 21세기 중국 대륙을 활보하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사업가와 학자, 정치가들이 많이 배출될 것을 기대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요셉과 모세와 다니엘과 같은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그 당시 약소 민족의 설움과 아픔의 역사 속에서 강대국 이집트와 바빌론으로 건너가 살았던... 우리 조선족과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꿈과 비전을 잃지 않았을 때 결국은 그 나라의 총리까지 되어 이집트와 바빌론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민족까지도 구했던 인물들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제자들을 통해 그 같은 꿈을 꾸어 본다. 동아시아와 세계를 움직일 정치적 지도자들까지도 배출될 것을 믿음 가운데 바라본다.

연변과기대에서의 생활 지난 7년 동안 내가 확인하고 또한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의 본질에 관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생의 참 행복이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데에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아(自我)라는 받침대 위에 자신의 인생 막대를 올려놓고 행복을 들어올리기 위해 힘주어 인생을 경영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지렛대의 원리처럼 자아(自我)라는 받침점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힘을 가할 때 더 큰 모멘트가 발생하여 더 큰 행복을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헌신의 문제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두리라고 한 말씀을 상기해 본다. 문제는 과연 내가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로서 죽을 때까지 풀어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집에서 베풀어진 잔치가 끝난 후에는 밭에 나가 열심히 아버지를 돕는 일꾼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은혜에만 사로잡혀 집안에서만 빈둥거리는 아들은 다시 한번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시대를 향해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할 밭이 놓여 있다.

 내 애인동무(이곳에서 아내를 두고 부르는 호칭)가 전교생에게 가르쳐 최근 유행된 노래 중에 <보리라>라는 노래가사를 끝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편 5,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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