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ge Of Engineering
서울공대 이야기

 

농장 악어,  늪 악어

박승익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졸업,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재료공학과 교수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외국대학 교수 임용사례


들어가기

  

  자기 방들을 놔두고 같이 자겠다고 응석을 부리며 안방으로 찾아 들어온 세 아이들과, 아내 틈에 끼어서 칼잠을 자다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난다. 갑자기 일어났더니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린다. 일어나 전화를 받고 창가에 가서 커튼을 제치면,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파란 하늘,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종려나무의 파랗고 길게 늘어진 가지, 싱싱한 야자나무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마이애미에 있구나...’ 점점 정신이 들어온다.


플로리다의 늪과 파충류

  

  플로리다에는 파충류들이 많이 산다. 동북부 펜실베니아에 살 때는 다람쥐들이 많이 살고 자동차에 받혀 죽어있는 사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도마뱀들이 많고 늪에는 악어들이 많이 산다. 며칠 전에도 손님이 오셔서 함께 에버글레이드 (플로리다의 대 늪지대) 에 갔다. 요란한 색의 새들이 날라 다니고 악어들이 물 속을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참 희한한 광경이다. 내가 미국, 그것도 남쪽 플로리다에서도 제일 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희한하게 느껴진다. 


미국과 영어

  

  내가 철이 들 무렵부터 미국은 나에게 천국으로 생각되었었다. 월남하신 아버님은 국군 소위로 한국전 동해안전투에 참가하시는 것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악착같은 근면함으로 장교임관 전부터 명성을 떨치시던 아버님은, 전후에 어지럽고 문제 많던 조국의 군대에서도 계속 성실하게 공부하셔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었다. 그토록 어려웠던 시절에 조국을 떠나서, 잘 정돈되고 발전된 미국 땅과 잘살고 여유 있는 미국 사람들이 아버님의 눈에 어떻게 비추었을까를 상상해본다. 미국사람들의 여유 있고 예의바른 생활규모와, 낮선 동양장교를 특별히 배려하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에 대해 아버님은 굉장히 큰 감명을 받으셨던 것 같다. 1950년대에 미국 보병학교와 1960대 말에 미국 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마치시고 귀국하신 후에, 아버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형제에게 미국에 대해서, 특히 미국의 좋은 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잘못하고 나서도 오히려 욕을 하는 운전자와 말다툼을 하신 후라든지, 아니면 동사무소에서 뇌물을 주고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대갈일성(大喝一聲)하신 다음이라든지, 어쨌든 좋지 않은 사회모습을 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돈되고 질서가 있는 미국사회의 모습과 미국사람들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존중에 대하여 이야기하셨다.

  

  미국에 대한 아버님의 교육은 일상생활에서도 이어졌다. 식사 때마다, 메뉴에 상관없이, 우리 형제는 정돈된 식사를 하라는 엄명을 받았고 이에 따라 된장국에 말은 밥을 총각무와 함께 입에 퍼 넣고 먹을 때도, 입을 다물고는, 음식 씹는 소리를 절대 내지 않고 먹었다. 물론, 직업군인이셨던 엄한 아버님의 명령에 대해, 눈 크고 겁 많던 나와 의리 있는 형은 한번도 No 라고 대답해본 적이 없다.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서, 미국은 아름다운 꿈의 나라로 내 생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혀 갔다. 어린 시절, 형과 나는 김포공항에 가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먹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이야기를 거의 매일 밤, 잠들기까지 했었다. 우리가 같이 미국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는데, 그날 밤은 여지없이 미국에 가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놈의 비행기는 한번도 이륙한 적이 없다. 비행기는 이전에 많이 다녀본 경기도의 국도로 이륙할 듯 할 듯 하다가 결국은 이륙을 해보지 못하고, 나는 아침 영어회화 음악을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 버리곤 했었다. 형과 나는 초등 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한 이후까지 새벽에 방송되는 영어회화를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군대 점호처럼, 아버님께서 들으실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미국사람의 발음을 따라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 대학에 다닐 때,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아지자, 아버님은 방송을 녹음하시고 중요한 부분을 편집하셔서 저희들에게 주셨다. 노는 일에 바빠서 매일 주어지는 영어 카세트테이프에 불평도 많았지만, 아버님의 정성은 정말 대단하셨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매일 5분 10분씩 10년 넘게 큰소리로 한 영어연습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영어실력보다는, 남들이 갖지 못한 깡다구로의 무장이었다. 그 ‘갈고 닦은’ 영어실력을 써먹기 위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외국인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피하는 데 나는 혹시 말이라도 걸어올까 싶어서 기필코 그 외국인의 옆에 가서 서 있었다.


대학(원) 생활


  미국을 좋아했지만 현실은 전혀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시대에 대학 다니면서 술 퍼먹고 공부 안하고 헤맨 것은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중생활을 살았다. 낮에는 빈 강의 시간에 어떻게든 당구 한 게임 더 치려다가 강의에 늦어서 눈썹을 휘날리며 강의실까지 뛰기도 하고, 밤이 되면 술에 절어서, 친구의 의리와 삶을 읊조리는 시인으로 돌변한다. 더 술이 많이 들어가면 술기운을 힘입어 얌전한 아이들은 철학가로, 튀는 아이들은 민주투사로 전이하고, 이차와 삼차로 가면서 이 다양한 계층의 친구들은 더 화끈한 술판을 찾기 위해 다시 하나가 된다.  술 먹는 친구들은 대부분 열역학적으로 효율이 별로 좋지 못했다.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은 먹은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거꾸로 반환하는 탁월한 기능을 선보여서 불변의 열역학 법칙을 깨는 과감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모두 같이 힘들어하면서 헤매고 있을 때, 나의 방황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공부를 해야할 이유는 아예 깨달은 적도 없고 주어진 시험과 과제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며 이후에 있을 술판과 이차 삼차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 사회도 어지러웠지만, 우리의 가치관은 더 어지러웠었다. 그때는 시간이 지나고 대학/대학원만 졸업하면 군대면제와 취직이 따 놓은 당상으로 기다리고 있어서, 과감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는, 훈련장이 아니라 참 아늑한 농장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안정된 취직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공대... 당시 우리들은 이러한 허황된 자신감으로 시간을 탕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과 같이 대학원에 갔다가, 석사만 마치고 취직하면 후회할 것이라는 선배들의 충고에 불안을 느껴서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1층에서 애 못 낳는 여자가 2층에 가면 애 낳을 수 있던가? 박사과정에 가서도 여전히 공부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계속 헤매다가 결국 중도에 포기할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사실 포기해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유를 모르고 조급하게 뛰기도 하다가 보통은 무기력하게 다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의식없이 쓸려가고 있었으니까. 이런 과정들에서도 마음속에 계속 남아있는 것은 미국에 관한 꿈이었다.  미국에 그토록 가고 싶으면서도 국비유학이나 Toefl 준비 같은 미국에 가기 위한 노력을 특별히 하지도 않았다. 단지, 미국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접어본적은 없었다.

농장의 악어


  얼마 전에 아이들과 함께 플로리다 늪지대에 있는 사파리에 놀러간 적이 있다.  농장주가 설명하기를, 늪지대의 악어를 농장에 옮겨서 닭고기 먹이를 몇 번 주면 그 악어는 다시 자연 늪지대로 돌아 갈 수 없다고 한다. 돌아가면 야생 늪지대에서 굶어 죽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동물원이나 수족관 어항에 갇혀 있는 악어가 활발하게 헤엄치고 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반면에 플로리다 늪지대의 악어는 먹이를 던지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물에 떨어지기도 전에 먹어치워 버리는 것이다.


미국행


  1994년, 박사논문에 관련되었던 연구를 발표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에서 열린 학회에 오게 되었다. 그해 여름은 기록적으로 더웠고 온 나라가 가물어서 管井을 파느라고 야단이었는데, 시원한 공항에서 콜라와 샌드위치를 하나 먹고 드디어 이륙이 가능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오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릴 때부터 생각하고있던 미국에 대한 꿈이 필터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학회 둘째날 밤, 별 사실적 믿음도 없었던 내가 Hotel 바닥에 무릎을 꿇고 30년의 세월이 실린 간단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 이곳에 와서 살게 해주세요.’  기도응답은 놀랄 만큼 빠르게 왔다. 이튿날, 대학시절 주특기를 살려 지루한 학회를 땡땡이 치고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하게 보였던 월마트에 딸아이 선물을 사러 갔는데, 한국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무슨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 분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미국에 올 생각 없으세요?” “당신 혹시 하나님이 보낸 천사 아니에요?” 나의 맞 질문에 황당해 하면서 김 박사님은 내일 인터뷰를 준비하라고 하고 돌아갔다. 그날밤은 참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이력서를 준비하고 예상되는 모든 질문과 답을 써서 외우고 특히 아버님께 배운 데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염두에 두고, 내 간단한 신앙고백을 영어로 준비했다. 다음날, 예상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질문에 상관없이 나의 신앙고백을 준비된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다음날 바로 귀국했는데, 1주일도 안돼서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돈 내고 살아도 감지덕지한 판에 월급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오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상한 곳이었다. 내가 원했던 곳이었지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는 곳이기도 했다.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의 Materials Research Laboratory 에서 일하는 것은, 일도 하고 미국 친구들과도 사귈 수 있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이었다. 팀의 발전을 위해, 주변에서 제시하는 아이디어와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냥 큰 계산 없이 열심히 했는데 기대이상으로 나의 연구성과가 좋게 나와서 이를 기반으로 미 해군(Navy)에서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투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project)가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체류기간이 연장되고, 학교에서도 감사하게도 공로를 인정하여, 나는 다른 나라에서 학위하고 온 사람으로는 드물게 교수라는 직함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눈에 끼워있던 필터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데는 약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위기를 촉발시킨 원인은 다름 아닌 영어문제였다. 자신 있던 영어가 이 사람들이 하고 있는 영어와는 거리가 먼 영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 있던 부분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모든 부분에서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심지어는 머리작고 잘생긴 미국사람들을 보다가 상가 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니 웬 머리가 저렇게 크냐...’  미국은 나의 꿈인 줄 알았는데, 내 이익을 채워줄 안전한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안과 걱정이 울렁거리며 다가오고 설명할 수 없는 흑암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1998년부터 2년간 가졌던 어려움은 33년간 느꼈던 모든 어려움을 합친 것 보다 더 컸다. 이곳에서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 이것이 정말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괴로워서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일단은 불러주는 곳도 없었지만, 평생의 꿈을 접고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에 계속 사는 것은 마치 단물 다 빠진 껌을 무작정 씹는 것과 같았다. 이미 이루어진 꿈 위에서 그냥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늪지대로 돌아오다


  농장에 있는 악어같이 보장된 미래와 안전한 현실에 안주하며 내 중심으로,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 것을 내려놓고,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시간 있을 때마다 진실하게 창조주 앞에 섰다. 이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단어 하나가 내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왔다. “그리스도”,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셀 수도 없이 많이들은 말인데,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말인데, 이 어려움을 통하여 내 가슴에 내려와 자리잡은 것이다. 나에게 이미 주어진 축복의 사실과 농장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 살아갈 이유가 서서히 깨달아 지기 시작했다.


  플로리다에 내려온 지 벌써 일년이 되었다. 작년 초에 독일 Fraunhofer Institute for Biomedical Technology의 Director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참 황당했었다. 인맥도 없고 경험도 충분치 못한 나에게 플로리다에 있는 Fraunhofer 재료연구소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왜 유능한 미국사람들 놔두고 얼굴 큰 한국사람에게 미국에 있는 연구소를 맡기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흥미로웠다. 약 6개월 동안 국제 학회에서 나의 연구발표 등을 살펴보고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나를 관찰해 봤는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있으며, ‘늪’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젊은 연구소장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늪에서 살 악어가 필요한데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냐고 물어봤다. 그는, 모국인 한국을, 그것도 학위까지 마치고 떠나서, 지금 미국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상태에서 안주하지 않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 더욱 그렇다고 하면서, 플로리다 연구소와 독일 연구소로 인터뷰를 겸해 초청했다.  속으로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고 생각했지만 일단 인터뷰에는 응했다. 이 인터뷰 과정 중에서 플로리다에서는 여름의 폭염에 기가 질리고, 독일의 연구소에서는 그들의 기술수준에 기가 눌렸었다. 아무리 독일의 연구소의 기술수준이 높고 좋아도, 모든 것이 나에게 익숙하고 이미 인정받고 있는 안락한 펜스테이트 대학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떨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이전 같으면 상상치도 못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도전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혹시 실패하더라도 지금 실패해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 배울 다시없는 기회를 놓칠 것 같아서 이었고,  셋째는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한 처음 몇 개월은 예상한 대로 죽음을 넘나드는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 플로리다 농장주의 말이 맞았었다. 급한 대로 여러 군데 도움도 청해 봤는데, 감사하게도 그 연한 닭고기를 던져주는 분은 없었다. 참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시 닭고기 몇 점 받아먹고 영영 쓰러질 수도 있었던 위험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신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고, 주어진 약속대로, 마음에 평화와 감사가 응답으로 주어졌다.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홀로 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만히 주변을 바라봤다. 이미 주어진 많은 축복들이 보였다. 플로리다 남부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의료와 유통이다. 플로리다의 크고 작은 시정부들은, 따뜻한 햇볕을 찾아 내려와 정착한 많은 노인들과 중남미에서 “무작정 상경”한 수많은 불법 이민자 들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 이미 개발되어 있는 통신기술과 연구소의 전문분야인 의료기술을 종합시키면 이전에는 인프라의 부족으로 불가능했던 의료지원을 작은 예산으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원거리 의료지원 시스템 (telemedicine)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축적된 초음파 (Ultrasound Transducers and Systems) 관련 기술을 이용하면 의료 분야뿐만 아니라 제조업과 유통분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므로 역시 추진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초음파 유량탐지기술을 통신기술과 접목하여 상하수도 수량을 항상 관찰하면 시 정부는 정확한 상수도 공급계획을 세울 수 있고, 따라서 많은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센서기술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응용분야의 심각한 제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스템 기술들을 센서/액츄에이터와 관련된 재료개발과 접목시키면 재료 분야, 소자 분야, 그리고 시스템 분야의 산업인 모두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또, 마이애미는 중남미 시장의 교두보이다. 한국의 기업들도, 중남미 마케팅을 위해 마이애미에 사무실을 개설한다. 기업들이 중남미에 직접 마케팅 캠프를 세우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남미 국가들의 열악한 사회 간접자본이 가장 큰 이유중 하나이다. 그래서 전기공급자동화 (Power Distribution Automation) 시스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기술은 카리브해와 중남미 국가들의 안정된 전기공급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꼭 한마디하라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기회이다. 삶의 중심과 방향을 회복하는 갱신의 기회이다. 지금 한국과 모교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위기는 매우 중대한 기회임을 알기를 바란다. 위기가 깊을수록 갱신의 위력도 대단하다. 이 갱신의 힘은 후배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후대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미국을 꿈꾸며 살았는데, 지금은 미국 같지 않은 미국에서, 늪지대 근처에서 살고 있다.  내가 7년 전에 이곳으로 바로 왔다면 그때도 호텔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곳으로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을까? 아마 아니지 싶다. 어려움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어두움을 이길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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