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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대 이야기

나폴레옹과 3인의 수학자

2005.10.07 08:06

hanabaro 조회 수:4546

 

역사가들은 저명한 지식인들을 평가할 때, 그들의 업적 못지 않게, 지조나 신념의 일관성 여부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제침략기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근, 현대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숱한 변절한 지식인 들의 사례가 많음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아픈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사를 돌이켜 볼 때도, 과학자들 역시 당대의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정치적 격변기에 있어서 대처하는 방향이나 처세가 각기 천차만별이었다. 끝까지 일관된 신념과 정치적 지조를 지키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유지하고자 능수 능란하게 변절과 변신을 거듭한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 전후로부터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부르봉 왕정 복귀에 이르는 시기는, 프랑스에서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일 뿐 아니라, 과학기술 부문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던 중요한 시기이다. 위대한 화학자 라부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1794)가 자코뱅 급진파에 의해 반동적 과학자 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미터법의 제정에 힘입은 도량형의 통일, 전문 과학기술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의 설립 등의 교육제도의 개혁, 군사기술을 포함한 여러기술분야의 급속한 발전 등 주목할만한 변화들이 매우 많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과 각기 관련을 맺은 저명한 수학자 세 사람-몽주, 라플라스, 푸리에-의 엇갈린 운명과 대조적인 처신을 살펴보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싶다.

 

몽주(Gaspard Monge; 1746-1818)는 젊은 시절에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을 창시한 것을 비롯해서 수학의 제도화에 큰 공헌을 하였고, 나폴레옹 시대에 그의 핵심적인과학참모 역할을 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몽주는 1746년 프랑스의 한 시골 읍에서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기하학과 기계조작 등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공병사관학교에 진학 추천되기도 하였으나, 신분이 낮았던 그는정식 장교는 될 수 없는 별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학교는 귀족 등의 상류계급 출신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그가 경험한 신분적 차별은 후에 그가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학후에 그는 입체를 몇 개의 평면에 투영하여 표현하는 화법기하학을 고안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아 공병학교의 조교수로 채용되어 학생들에게새로운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몽주는 이후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과학자들과 교분을 맺으며많은 저서와 논문을 저술하는 한편, 수력학 연구소장과 해군사관학교 교수직 등을 역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곧 자코뱅당에 가입하여 혁명과정에 열렬히 참여하였고, 혁명정부 아래서 해군장관을 거쳐 군수공장의 총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군사관련 기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혁명정부가 과학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서 에콜 폴리테크닉을 창설하자 그는 그곳의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힘썼고, 이후 나폴레옹이 득세한 후에는 그를 따라 이집트원정에도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정권하에서 몽주는 에콜 폴리테크닉 교장, 상원의원 등으로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나폴레옹의 중추적인 과학고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종 되뇌르(La Legion d honneur)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몽주 역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유럽자유전쟁 때에 그는 67살의 나이로 적에 대항하고자 방위군을 조직하여 항전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파리는 함락되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몽주는 다시 희망을 걸었으나, 백일천하로 끝나고 워털루의 패전으로 나폴레옹은 결국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부활한 부르봉 왕조는 몽주를 적으로 간주하여, 그를 모든 공직에서 추방해버렸다.

 

그는 왕당파의 추적을 피해 빈민굴을 전전하다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치매상태가 되어 72세의 나이로 비참한 최후을 맞았다. 몽주는 나폴레옹에게 모든 충성을 바친 만큼 그가 몰락한 이후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고, 결국 나폴레옹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라플라스(Pierre Simon Laplace; 1749-1827)는 뉴튼의 고전역학을 계승, 발전시킨 수리물리학의 대가로서, 흔히 프랑스의 뉴튼 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남긴 우주의 모든 물체들의 초기조건을 알고 그것들에 적용되는 운동방정식(미분방정식)을 동시에 풀 수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은 이후 근대사회의 세계관이 된 기계적 결정론의 패러다임을 대표한다. (물론, 20세기 들어 양자역학과 카오스이론의 출현으로 이런 세계관은 철저히 무너지긴 했지만...) 라플라스는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어려웠으나 그는 수학에 특출한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독지가의 후원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학을 나온 후 파리 육군사관학교의 수학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로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많은 논문을 저술하였다.

 

라플라스는 그 무렵의 다른 수학자들과는 달리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혁명정부와 뒤이은 나폴레옹 정권 하에서 계속 중용되었다.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되자 그는 내무장관으로 입각하였으나, 행정능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반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훗날 나폴레옹은 그를 평하여, 수학자로는 최고였으나 행정관으로는 낙제였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질구레한 일에만 간섭하는가 하면, 수학의 무한소(無限小)의 원리를 행정에까지 적용시키려 들었다.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플라스는 그 대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고, 상원부의장을 거쳐 나폴레옹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도 수여 받았다. 라플라스는 그의 대표적 저서 천체역학론 을 완성하여 나폴레옹에게 바쳤는데, 이때 나폴레옹이 그대는 우주의 체계에 관해 이 같은 대저서를 저술했으면서도 왜 우주의 창조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자, 그는 각하, 저는 그같은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천체역학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책을 저술했을 때에도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헌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유럽동맹군이 파리로 입성하자, 라플라스는 재빠르게 나폴레옹의 퇴위에 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자 그는 루이18세의 무릎 아래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였고, 이후 출간된 천체역학론 재판본에서는나폴레옹에게 바치는 헌사 부분은 루이18세에게 바치는 헌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는 복고 왕정시대에도 높은 지위를 잃지 않았고, 출세하여 후작의 지위까지 얻었다.

 

라플라스는 프랑스 혁명기의 수학자들 중 시대의 조류에 맞춰서(?) 가장 약삭빠르게 처신한 덕택으로 화려하고 평온한 생애를 보냈으나, 그의 변절과 배반, 지조 없음은 후세 사람들에게서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는 열전도 이론으로 유명한 수학자이며, 그가 제시한 이른바 푸리에 급수 라는 수학적 수단은 오늘날에도 광학을 비롯한 물리학, 여러 공학 분야에도 널리 응용되는 중요한 것이다. 푸리에는 양복가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고아가 되어서, 사원의 성직자에게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다. 역시 어릴 적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신분상 불가능하였고, 수도사의 길을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수도원을 나왔고, 파리로 가서 혁명의 과정에 계속 열렬히 동참하였다.

 

혁명정부 아래서 그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이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시 몽주와 함께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푸리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도 이집트에 남아서 일하다가, 귀국 후 이제르 현의 지사로 임명되었다.

 

그후 푸리에는 나폴레옹 정권아래서 오래도록 지사를 지냈고 남작 작위까지 받았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엘바 섬에 유배되자 루이18세에게도 충성을 맹세하여 그 자리를 보전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폴레옹군에게 체포되었고, 다시 부르봉 왕조에 대한 서약을 버리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부활이 백일천하로 끝나자, 루이18세는 푸리 에의 변절을 괘씸하게 여겨 모든 공직에서 그를 추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한때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까지 빠졌으나 옛 제자의 도움으로 통계국장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어 그럭저럭 평온한 만년을 보냈다.

 

푸리에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는 등, 어찌 보면 불행한 사람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평론가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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