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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대 이야기

장미의 이름, 중세와 근대의 경계

2004.06.10 02:32

lee496 조회 수:4754

장미의 이름, 중세와 근대의 경계

    

어느 체제이든 그 체제가 꺼리는 지식들이 있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 힘을 가진자가 그 지식의 유포를 금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근까지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방패삼아 접근은 커녕 입에 올리는 것초차 허용되지 않았던 책들이 이러한 금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지가 영원한 법은 없다. 언젠가는 해제되고, 아니 파괴되고 갖혀있던 지식들은 자유롭게 유통된다. 금지된 지식의 해방과 시대 상황의 변화는 서로 상승 작용을 하면서 급작스레 일어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극화한 {장미의 이름}에선 중세 유럽에 존재했던 몇 개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갈등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가 놓여있다. 그 시대의 지배적인 원리들을 제공했던 기독교는 그 원리들을 벗어난 것들에 적대적인 시선을 던지며 맹렬히 공격했다. 영화의 배경인 1327년, 산중의 한 수도원. 여기서 베네딕트 수도단과 프란체스코 수도단의 수도사들이 청빈의 문제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500년대에 창설되어 중세 수도원 전성시대를 열었던 베네딕트 수도단과 교황청의 입장은 수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에 대한 교회의 소유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새로 생겨난 탁발 수도회인 프란체스코 수도단은 그 소유를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권력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라 오랜 기간 힘을 독점했던 교단은 영주권까지 겸해가며 황금을 쌓아갔고 이러한 상황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갈등이 격렬한 싸움으로 발전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 버린다. 아마도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교회는 교회 밖에 있거나 교회 밖으로 내몰린 형제 아닌 사람들에겐 온 힘을 다해 싸움을 걸었다. 거의 200여년간 진행되었던 여덟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회는 내부 결속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를 잃어 버리게 되었고 이단 색출과 마녀 사냥이란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냈다. 영화에서 화형에 처해지는 인물이 셋 있다. 그중 둘은 전직 돌치노 수도사들이다. 이들은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혼교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해 이단으로 몰린 돌치노가 설립했던 수도회에 몸을 담았었다는 이유로 영화 속의 수도원에서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을 받는다. 이들과 함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도사들에게 몸을 팔았던 굶주린 소녀가 마녀로 몰린다. 당시, 이단과 마녀/마법사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여겨졌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이야기 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굶주림에 지친, 나중엔 분노를 폭발시켜 이단 심판관의 마차를 뒤엎는 군중들. 전염병과 가축들의 돌림병, 흉년과 자연재해 따위의 숱한 불행에 괴로와하던 이들을 달래기 위해선 희생양이 필요했고 오랫동안 교회는 그 책임을 유대인에게 떠 넘겨 왔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든가, 빨리 병이 옮게 만들려고 문의 손잡이나 벽에 기름을 칠했다는 따위의 악의적인 조작이 계속되었다. 이것만으로 일반 대중들의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때, 마녀가 희생양으로 등장한다. 특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천재를 겪을땐, 폭풍우를 부르거나 가축을 몰살 시킬 수 있는 마법을 소유한 마녀를 억지로 찾아내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오늘날에도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민간 요법이나 주술에 기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하물며 중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 마법의 유혹 앞에 약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체제, 하나님의 권위를 위협하는 마법을 금지하고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이중의 효과를 보기 위해 교회는 숱한 마녀들을 고문을 통해 조작했다. 그리고 군중들이 이들에게 화풀이하도록 선동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북한의 위협을 곧잘 들고 나오곤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는 앞에서 예로든 갈등의 대상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성경을 기초로한 서양 중세 사회는 갈릴레오가 새로운 과학이라고 부른 근대 과학 앞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근대 과학은 이단이나 마법과는 달리 수그러들지 않고 세상에 새로운 원리를 제공했다.

 

◆ 영화에서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의 활약은 명탐정 셜록 홈즈를 많이 닮았다. 사본을 만들던 수도사중 하나가 닫혀 있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처럼 죽어있었을 때,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치부하고 그 하수인을 찾는데 골몰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의 죽음에는 자연적인 원인이 있으리라 믿고 작은 사실들을 놓치지 않고 수집해 타살된 뒤에 그곳으로 옮겨졌음을 밝혔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단순히 윌리엄이 뛰어난 탐정이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여러분은 아마도 영화의 인물들 중에서 윌리엄을 가장 뛰어난 탐정으로 손꼽겠지만 중세인들이라면 분명히 이단심판관 베르나르 드 귀를 지목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중세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의 원인을 악마로부터 찾는 관행이 있었고 그 하수인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자신이 마녀/마법사임을 자백하게 만드는데 정통한 사람이 뛰어난 해결사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의 명탐정 윌리엄의 작업 방식을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과 악마의 권능과 기적을 믿는 사람들에게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원인을 끝까지 추구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윌리엄의 생각은 달랐고 그것은 조금씩 움터 오던 근대 과학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 과학사에서는 과학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찾는다. 우주가 물, 불, 혹은 공기 따위로 이루어 졌다는, 우리가 보기엔 한심한 주장을 한 그들을 왜 과학의 시조라고 부를까? 그것은 그들이 세계를 하나의 틀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 사람인 탈레스 이후에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면서 초자연적인 원인을 들먹이지 않고 자연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과학을 집대성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 이후에는 자연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참동안 눈에 띄는 진보가 별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독교가 힘을 갖게되자 재능있는 사람들중 누구도 자연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가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중세가 결코 암흑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나름의 활기를 가지고 있었고 기술적으로도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세 유럽에서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더구나 지적인 활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장서관을 지키던 원로 수도사 호르헤를 떠 올려 보자.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키면서까지 호르헤가 밖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웃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장서관 안에는 훨씬 많은 것들이 갇혀 있었다. 영화에서 스쳐가는 화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체 해부도, 천체도 같은 것들이 장서관 안에 시학과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던 자연에 대한 지식들은 수도원의 장서관 안에 묻혀 있었다. 아니, 많은 부분은 유실된채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가 끝나갈 무렵의 교회는 웃음이나 과학이 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행여 앗아갈까 조바심을 쳤다. 이러한 조바심은 13세기에 여러차례 반복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중 일부와 그 주석서들에 대한 금지령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성경이외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던 사람들이 다시 자연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 하나의 답으로 정리하긴 힘들다. 분명한 것은 12, 13세기 무렵부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윌리엄이 늘 나의 위대한 스승 이라 일컫는 로저 베이컨이 이러한 태도를 대변한다. 13세기 영국의 고전학자였던 그는 실험을 강조했고 유럽에서 안경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이 안경이란 물건이야 말로 자연에 대한 진지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로마 시대부터 볼록렌즈의 성질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안경으로 사용할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로저 베이컨은 렌즈로 근시를 교정할 생각을 해 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렌즈는 망원경과 현미경의 형태로 자연을 관찰하는 도구로 자리 잡았다. 자연에 렌즈를 들이댄다는 것. 영화에서 윌리엄이 렌즈를 코 앞에 대고 이것저것 유심히 살피던 모습이 던지는 이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 영화의 배경인 14세기는 우리가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17세기와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다. 하지만 과학혁명을 준비하는 많은 조짐들이 이때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에선 장서관이 불타고 번역사와 필경사들이 죽어 나가지만 장서관과 번역승들은 금지된 지식을 유포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실제로 14세기는 수도원에 보관된 옛 지식들이 서서히 복원되고 아랍으로 흘러들어갔던 과학 지식들이 대규모 번역 사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자연에 대한 관심의 복원이 사회·경제적인 변화들, 예컨데 지리상의 발견, 경제의 팽창 등과 중첩되면서 지금까지 계속되어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근대를 구성하는 원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중세에 드리워진 기독교의 장막을 암흑이라 부른다면 그것을 걷어낼 근대과학, 근대정신이 한줄기 빛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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